표현주의와 서사극

20세기 연극의 혁신적 흐름인 표현주의와 서사극을 상세히 살펴봅니다. 사실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표현 방식과 브레히트의 혁신적인 연극 이론을 통해 현대 연극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20세기 초반, 연극계는 획기적인 변화의 물결을 맞이했습니다. 19세기를 지배했던 사실주의적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했고, 그 중심에는 표현주의 연극과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새로운 형식 실험을 넘어, 연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혁신적 흐름이 어떻게 현대 연극의 지평을 넓혔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실험적 공연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1. 표현주의 연극의 특징

사실주의 극복 

표현주의 연극은 191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전 세계 연극계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지배적이었던 사실주의적 재현 방식에 대한 강력한 반발로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과감하게 외형화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내면의 외화(外化) 과정에서 표현주의 연극은 인물의 심리적 현실을 물리적으로 가시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게오르크 카이저의 《아침부터 자정까지》에서 주인공의 정신적 붕괴는 무대 공간의 왜곡된 구조와 불안정한 조명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시각적 실험을 넘어, 근대 산업사회에서 파편화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현 수단이 되었습니다.

극작술의 변화

표현주의 극작술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구조를 과감히 해체했습니다. 선형적 서사 대신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의 연쇄를 통해 현대인의 분열된 의식을 반영했으며, 이는 후일 포스트모던 연극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대사의 혁신적 처리입니다. 전통적인 대화 대신 단편적이고 압축된 언어, 때로는 문법적 규칙마저 파괴하는 실험적 대사를 통해 인간 내면의 비이성적 측면을 드러냈습니다. 예를 들어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에서는 짧고 단절된 문장들, 반복되는 단어들을 통해 전쟁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혼돈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무대 미학 

표현주의 연극의 무대 미학은 당대 미술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디 브뤼케(Die Brücke)'나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 같은 예술가 그룹의 영향을 받아, 과감한 색채 대비와 기하학적 구성을 활용했습니다.

 

조명은 더 이상 단순한 무대 장치가 아닌 극적 표현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습니다. 예를 들어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에서는 강렬한 명암 대비와 색채 조명을 통해 인물의 심리 상태와 극적 긴장감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 《꿈》(1925)에서는 조명의 리듬적 변화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습니다.

 

무대 디자인에서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요소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왜곡된 원근법, 비대칭적 구조물, 과장된 층위 등을 통해 현실의 물리적 법칙을 초월한 새로운 무대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특히 에르빈 피스카토르의 실험적 무대는 회전무대, 영사막, 다층 구조물 등을 활용해 표현주의적 비전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주의 연극의 혁신은 현대 연극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특히 실험극과 아방가르드 연극의 발전에 중요한 이론적, 실천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2.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

소외효과의 원리 

브레히트가 제시한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는 20세기 연극의 가장 혁신적인 이론적 성과 중 하나입니다. 이는 단순히 관객을 극적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을 넘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이끌어내는 복합적인 미학적 장치였습니다.

 

소외효과의 핵심은 '낯설게 하기'입니다.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상들을 특별하고 이상한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그 현상의 본질과 문제점을 새롭게 인식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사천의 선인》에서 주인공이 선과 악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강요되는 도덕적 분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서사적 구조 

브레히트는 전통적인 극작술의 근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 이론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는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 대신, 이성적 판단과 비판적 사고를 촉발하는 새로운 극작 원리를 제시했습니다.

 

서사극의 구조적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에피소드식 구성입니다. 각 장면은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며, 느슨하게 연결됩니다.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에서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12개의 장면들은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우화처럼 기능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사회적 기능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선전이나 교조적 메시지 전달과는 거리가 멉니다. 대신 관객들이 스스로 사회 현실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유도합니다.

 

특히 브레히트는 변증법적 사고를 연극의 핵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갈릴레오의 생애》에서 과학의 진보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대립적 가치가 충돌하듯, 그의 작품들은 항상 복잡한 사회적 모순을 다층적으로 조명합니다. 이때 관객은 수동적 관찰자가 아닌, 적극적인 판단과 선택을 요구받는 참여자가 됩니다.

 

브레히트는 또한 '레어슈튀케(Lehrstücke, 학습극)'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연극의 교육적 기능을 실험했습니다. 이는 배우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참여자가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는 집단적 예술 실천의 장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3. 새로운 연기 방법론

표현주의적 연기

표현주의 연극에서의 연기는 일상적 동작의 재현을 넘어 인간 내면의 본질적 감정과 심리 상태를 극대화된 신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특히 오스카르 코코슈카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 배우들은 신체를 추상적 조형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과장된 동작의 사용은 단순한 과장이 아닌, 내면의 진실을 외부로 투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오폴드 예스너의 연출 아래에서 프리츠 코르트너는 《리처드 3세》역을 연기할 때, 왜곡된 신체 움직임을 통해 권력의 기형성과 인간성의 붕괴를 표현했습니다.

서사극의 연기

브레히트가 발전시킨 '게스투스(Gestus)' 개념은 현대 연기론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게스투스는 단순한 제스처가 아닌, 인물의 사회적 관계와 태도를 함축하는 총체적 표현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헬레네 바이겔이 《억척어멈》을 연기할 때 보여준 것처럼, 개인의 심리가 아닌 사회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연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보여주기' 연기입니다. 배우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대표적 배우였던 에른스트 부쉬의 연기에서 잘 드러났는데, 그는 종종 연기 도중 관객을 직접 응시하거나 자신의 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방식으로 이 원리를 실천했습니다.

앙상블 작업

20세기 초반의 실험적 연극들은 개인 배우의 스타성보다 앙상블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 연기론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 연극에서는 집단적 움직임의 리듬과 조화가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었습니다.

 

특히 코러스의 활용은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와 달리, 표현주의와 서사극의 코러스는 사회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동시에 비판적 논평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피스카토르의 정치극에서 코러스는 종종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즉흥과 실험도 중요한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브레히트의 모델북(Model Book)이 보여주듯, 공연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험과 수정을 통해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배우들은 연습 과정에서 다양한 즉흥을 통해 인물의 사회적 관계와 상황을 탐구했고, 이는 최종 공연에서도 살아있는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4. 무대 기법의 혁신

새로운 무대 디자인

20세기 초반의 실험적 연극들은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공간 구성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아돌프 아피아와 고든 크레이그의 이론적 영향 아래, 무대는 더 이상 현실을 모사하는 평면적 공간이 아닌, 3차원적 조형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층적 구조의 활용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예를 들어 피스카토르가 《좋은 군인 슈바이크》공연에서 사용한 3층 구조의 회전무대는 동시다발적 사건의 표현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급 사회의 수직적 구조를 시각적으로 은유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습니다.

기술의 활용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연극의 표현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영사기술의 활용은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브레히트는 《갈릴레오의 생애》에서 천체 운동을 보여주는 영상을 투사했고, 피스카토르는 《정글 속의 아스팔트》에서 다큐멘터리 영상을 극적 요소로 활용했습니다.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의 혁신도 주목할 만합니다. 표현주의 연극에서는 전통적인 배경음악을 넘어, 기계음, 공장 소음, 군중의 함성 등 현대 도시의 소리를 극적 요소로 활용했습니다. 특히 쿠르트 바이일이 브레히트의 작품을 위해 작곡한 음악들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혁신적이었으며, 뮤지컬 씨어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관객과의 관계

무대와 객석의 전통적인 경계는 적극적으로 도전받았습니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오이디푸스 왕》공연에서 원형극장 형식을 도입하여 관객을 극적 공간의 일부로 포함시켰고, 브레히트는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에서 무대 위의 표지판과 프로젝션을 통해 관객의 비판적 거리두기를 유도했습니다.

 

환경연극(Environmental Theater)의 개념은 이러한 실험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공연은 더 이상 무대 위에 국한되지 않고, 극장 전체, 나아가 일상적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을 수동적 관람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 변화시키는 시도였습니다.

 

또한 객석 배치의 실험도 주목할 만합니다. 피스카토르의 '전체극장(Total Theater)' 구상이나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에서 보여준 것처럼, 관객의 물리적 위치와 시점은 연극적 경험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후일 사이트 스페시픽(Site-specific) 공연이나 참여형 공연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

마치며

표현주의와 서사극은 20세기 연극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의 시도는 단순히 형식적 혁신을 넘어,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의 본질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표현주의 연극은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모든 관습을 과감히 해체했고, 이 과정에서 발견된 새로운 표현 방식들은 현대 연극의 미학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한편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연극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가능성을 새롭게 정립했으며, 특히 그의 소외효과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개발한 다양한 기법과 방법론은 현대 연극의 기본 어휘가 되었습니다. 멀티미디어의 활용, 공간의 유동적 활용, 관객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 등은 오늘날 실험극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관객을 수동적 관람자가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보는 시각은 현대 공연예술의 중요한 전제가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제기한 질문의 현재성입니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 관객과의 관계,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관계 등 이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맥락에서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표현주의와 서사극의 유산은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닌, 현대 연극의 살아있는 자양분이자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연극은 또다시 큰 변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팬데믹으로 인한 공연 방식의 변화, 사회적 양극화 등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표현주의와 서사극의 혁신적 정신을 되새기며, 동시대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표현주의와 서사극